음악엔 도통 흥미가 없는게 나다. (그럭저럭 학교땐 이론 점수는 잘 받은 거 같은데...)
3년을 넘게 태지 보이스 일을 해 왔지만, 무슨 무슨 장르라고 음악을 구분하는거며 심지어 시나위 시절 태지의 주 종목이었다던 베이스 소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지내고 있었다.
<발해를 꿈꾸며>가 나오고 있었던 녹음실 - 기회구나, 물었다.
"베이스 소리가 도대체 어떤 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다른 악기 소리보다 더 낮게 밑에서 둥 둥 둥 울려 나오고 있잖아요. 둥- 둥- 둥"
난 진실로 귀 기울여 듣고 있었고, 이윽고 다시 물었다.
"그럼, 그게 큰북인가요?" ...... 정말 할말없어 하던 그의 표정이라니...
"음악 좀 열심히 배우란 소린 안할께요. 이미 늦은 거 같구요.(웃음) 그래도 최소한 음악을 이해하려는 마음은 가져야 되지 않겠어요? 전 처음 음악 할 때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용기 같은 것도 생겼구요. 무엇 보다 생각이 넓어져요. 아주 넓게..."
근데 난 아직도 제대로 음악을 이해 못하고 있다. 아직 생각이 좁은 건가. 큰일이네!
*
어이없게도 3집을 시작한 지 한 달을 넘기기도 전에 쏟아져 나온 사탄설 - 서태지의 노래에서 악마의 소리가 난댄다. 백워드 매스킹이라는 그야말로 이국적인 단어를, 단어 자체로의 뜻으로만 해석한 나는 실제 외국 음악들에서는 간간이 있어 왔다는 소리를 접하고, 길지도 않게 물었다.
"진짜에요?" 내눈이니 보진 못했지만 반신반의의 호기심찬 눈이었으리라.
"뭐가요? 사탄이요? 우리 외할머니가 그러대요. 내 80평생 하나님 집에 다니는 신자지만 사탄 한번 보려고 해도 못봤다. 지들이 사탄이 무슨 소릴 내는지 알기나 하는 건지. 전 이제 스물 셋인데요. 우리 외할머니도 못 봤다는데 제가 어떻게 보겠어요. 어린 놈이... 설사 (사탄이) 찾아온다 해도, 잠적기 때 저 아무도 안 만난다는 거 알잖아요? 헤헤."
*
만지고 조립하고 날리고 조종하는 그 많은 R/C기기 들을 <플라밍고>라는 R/C 기기 전문점에서 구입한다고 했다.
"비싸요? 거기 몇 시에 문열어요? 어딨어요?" 라고 지극히 소비자다운 관점에서만 묻고 있는 내게,
"거기요? 말이 가게지 아는 사람만 알고 찾아오는 데예요. 주인이 그냥 좋아서 하는 거 같던데... 아침에 문 열고 저녁에 문 닫는 그런 가게가 아니더라구요. 저만해도 보통 새벽 2시나 3시쯤 가거든요. 미리 전화 연락은 해 두고 가죠. 가게 앞에 가서 문을 두드리면 한참 있다 안에서 사람 소리가 나고 불을 켜는 소리가 들려요. 그러면 전 몇 발자국 떨어져 셔터문 올라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밑에서부터 서서히 가게 안의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죠. 10cm, 20cm씩 셔터 문이 올라가고 안에 있는 모형 비행기들이 불빛 아래 놓여 있는 게 조금씩 조금씩 보일 때마다 꼭 보물 창고 앞에 서 있는 그런 기분이 들어요.
어서 어서 열려라! 주인님이 왔단다!"
*
꼬박 하루를 한 음(音)에 매달려 밤을 새고 있을 때였어요.
방이 건조하다고 흰 빨래 몇 벌을 엄마가 방에 널어 두셨는데, 새벽이 왔는데도 그 마디(노래)는 잘 풀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뻐근한 허리를 돌려 잠깐 누웠는데 바짝 마른 빨래가 잡혔어요.
그 밤 내내 내 방의 습기를 위해 이 빨래는 이렇게 바짝 말라 있는데,
난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구나 하는 그런 초조한 생각이 들더군요.
......새벽이었는데 깜깜하다고 느꼈습니다.
*
스노우보드라니! 스키도 아니고.
옌 어디서 이렇게 희한한 것만 배워 오는 거야 하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셋이서 무주리조트엘 다녀왔단다. 스노우보드를 일주일씩이나 타고 온 태지 -
"콘도에서 새벽에 창을 열면 아직은 어두운 새파란 세상이 눈에 들어와요. 날 밝으면 온통 흰색인데 그 새벽엔 암튼 파랗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럴땐 해가 떠도 고맙고 바람 부는 것도 고맙고 쌓여 있는 눈을 봐도 고마웠어요. 아침 일찍, 서울에 있으면 절대 깨 있을 수 없는 그 시간에, 단단히 중무장을 하고 정상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번 하고 내려가죠. 빠르게 내려가는, 그냥 그렇게 나를 모른체 휙휙거리며 지나가는 풍경들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을 타고 내려 갈 땐 <궁리>라는 것이 머리 속에 들지 않아 좋아요.
이렇게 끝도 없이 흘러가 버렸으면, 이렇게 훌훌 벗어버리고 깨끗해졌으면..."
*
"한 부부가 나와요.
이른 아침인거 같았구 아주 따뜻한 분위기가 나는 집이었는데, 아무 말없이 그 부부는 눈빛으로 사랑의 인사를 나눈 뒤, 남편은 출근을 했습니다. 그리고 화면은 집에 남아 있는 아내와 또 바쁘게 회사일에 몰두하고 있는 남편을 보여주죠. 근데 남편은 때때로 전화를 걸고 있는 주위 동료들을 쳐다보기도 하면서 뭔가 굉장히 초조한 모습이예요. 그러던 어느 순간 남편의 얼굴은 환해지면서 화면은, 집에 있는 아내의 얼굴을 비춰 줍니다. 그 아내의 손에는 남편이 보낸 팩스용지가 들려 있었죠.
<오후 2시- 당신이 27년전 태어난 그날, 그 시간! 난, 당신만큼이나 이시간을 사랑할거야. 생일 축하해>
그때까지 전 그랬죠. - 별 고리타분한 사랑도 다 있네. 나 같으면 좋은 음악에 사랑의 노래라도 불러주겠다. 아님 시원하게 전화라도 걸어 큰소리로 사랑한다고 말해 주던지...
그러나 그 다음 화면을 보고는 순간, 멍해졌습니다.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이 보이고, 너무나 반갑게 그를 맞이하고 있는 아내- 아무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두사람은 드디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그건 -그건- 수화였어요. 수화, 아주 부드럽고 섬세한 손놀림. 그들은 벙어리 부부였던 겁니다.
음~ 꼭 영화같죠? 그전에 일본 갔을 때 본 팩시밀리(FAX) 광고예요. 호텔룸에 앉아 봤던 건데 밤시간동안 세번정도 그 CF가 나오더군요. 제가 원래 웬만한 건 기억도 못하고 또 뭐 볼시간도 없고 그러는데요, 이건 광고였다는게 좀 그렇지만, 제가 본 어떤 영화보다도 더 기억에 남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땐 참 많은 걸 생각했던 거 같아요. 말없는 사랑이라는 거, 아니 말이 필요없는 그런 사랑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음~, 제가 또 뮤직 비디오 욕심이 많잖아요? 음악에 담긴 메세지도 중요하지만 그 메세지를 영상에 담았을 때, 그걸 보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동이라는 것도 생각하게 되더군요. 많은 걸 담아낼 순 없겠지만 적어도 확실한 느낌하나는 남겨 줘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슬픈 아픔>에 대해 곡 설명을 들을 때였다. 그런 말은 없었지만, 아마도 인간의 육체적인 장애 (생각해보면 결코 장애가 될 수 없는) 라는 것에 대해 그 때부터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는 길 밖에도 세상은 있다: 다시 시작되는 우리들의 이야기> pp. 3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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