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을 하는 데에도 영감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평론도 예술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창조이기 때문이다. 내가 서태지 신보의 리뷰를 아직
못쓰고 있는 것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영감없는
리뷰를 싫어한다. 마치 영감없는 작품을 싫어하듯이.
물론 영감이 없어도 말은 할 수 있다. 예를들어 모아이에서 엠비언트 스트링이 한 옥타브 쯤 낮아졌다든지. 아침의 눈에서 드럼이 익스플
로젼스 인 더 스카이를 연상시킨다든지. (그리고 전체적으로 보면 넬같은 느낌도 든다.) 레플리카의 글리치 idm이나, 내가 바라던 장르
조합은 정작 서태지 8집 티져에서 들을 수 있었다든지. (일렉트로닉 기반의 글리치 idm을 듣고 싶었다.) 신곡 두곡은 좀 실망이었다든지.
사실 서태지는 이번 정규 앨범의 반응이 별로 안좋아도 이미 본전 이상은 뽑았다고 본다. 벌써 일년 동안 서태지라는 이름을 쭈욱 각인
시켜왔지 않은가. 모아이부터 버뮤다, 줄리엣, 코마, 그리고 아침의 눈에 이르기까지. 그런 분산은 지속성을 낳았다. 동시에 집중력 또한
분산되었다. 그런 분산은 단점이라기 보다는 서태지 자신의 선택에 가깝다. 그러니 그 결과도 서태지는 만족해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만족하지 못한다면 애초에 자신이 선택한 분산이라는 전략을 후회하고 있다거나 혹은 미쳐 그런 결과일 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해야겠지.
정작 서태지의 8집이 흥미롭지 않았던 이유는 (그자신에게든 혹은 나에게든) 이미 모든 것이 정해져 있었고 차례차례 패를 펄쳐 보이는
과정만이 남아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패가 많았을 때는 기대도 많았지만 패가 줄어들면서 기대도 줄어들었고 마침내 패가 없어지자
기대도 없어졌다. 이건 당연한 현상이다. 문제는 그 일년 여의 시간동안 서태지는 모든 것을 계획적으로 행동하고 실행하고 실현시켰다는
것이다. 그 계획성은 서태지의 장점이라고 말해지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창조성이라는 것은 항상 계획성에 의해서만 발현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일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이미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계획성이라는 것은 자칫하면 루즈해질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청자에겐 그래도 좀 덜하다. 왜냐하면 패가 남아 있을땐 그것을 여전히 기대할 수 있으니까. 근데 창작자는 이미 패를 전부 알고 있다.
단지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 펼칠지, 어떻게 펼칠지 정도다. 만약 창작자가 자신이 앞으로 펼칠 패에 질려 버리게 된다면? 흥미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이건 비유하자면 내가 글을 미리 많이 써놓고 차례로 블로그에 공개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당연히 나는 그 중간중간
새로운 글이 쓰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몇달이 지나면 과거의 글이 흥미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글은 쓰고 싶을때 영감이
떠오를 때 마다 바로바로 쓰는게 가장 좋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서태지의 실수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을 계획적으로 미리 정해진 코스로
차례차례 자신이 미리 만들어놓은 패를 펼치면서 활동했다는 점이다.
그 증거로 서태지는 코마 티져와 아침의 눈 티져를 거의 동시에 발표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 자신이 자신의 패를 펼치는 것에 있어서
흥미를 잃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8집이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새로운 노래를 만들 수도 없다. 어떻게 전개될 지 훤히
보이는 영화나 소설처럼. 혹은 발라드 노래처럼. 그렇게 서태지에게 이번 서태지 8집의 활동은 서서히 지겨워졌던 것이 아닐까.
서태지는 굉장히 창조적이고 전복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모든 놀이하는 어린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아방가르드한 감수성까진 아닐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런 종류의 감수성이 있다. 그는 단순한 장인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서태지의 치밀한 계획성은 항상 장점으로
여겨져 왔다. 나는 그것을 약간 강박적이라고 보는데 이것은 그 강박증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좋게 받아들여져 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꼭 창조성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완성도면에서는 도움이 되었겠지만. 창조력 자체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창조는 돌발적이다. 계획성 속에서 미리 정해져 있는대로 생겨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서태지가 욕먹는 건 신곡이 두곡 뿐이라 그런 거다. 이건 팬들도 실망했을 거라고 본다. 단지 팬들은 욕을 안하는 것이고. 싱글 1이나 2
처럼 신곡이 세곡만 되었어도 욕은 훨씬 덜 먹었을 거라고 본다. 세곡과 두곡의 차이는 크다. 리레코딩 이런건 하면 좋지만 안해도 딱히
상관없었던 것이고. 즉 우리는 서태지가 펼칠 패가 몇장인지부터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대감과 결과물 사이의 차이. 그 차이가 욕을
만들어낸 것이다. 사실 신곡은 4곡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렇다. 하지만 새로운 곡은 두곡이다. 처음부터 신곡이 4곡 실릴 거라는 것은
예고되어 있었다. 나는 리믹스가 실릴 것도 예상했었다. 앞서 말한대로 리믹스 한곡 추가에 신곡 3곡이라는 싱글 포맷이 한번 더 나오기만
했어도 욕은 훨씬 덜 먹었을 것이다.
사실 서태지의 8집이 명반이 될 거라는 건 싱글 2 발표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동시에 미발표 신곡에 대한 기대감에 의해 추동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기대감이 사라진 지금, 어쨌든 그 기대감이 사라진 만큼 결과물이 그 자리를 채워주지 못했기에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렇지만 언젠가는 8집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날이 올 것이다. 지금은 아니다. 기대라든지 실망이라든지 이런건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작품 외적인 기준에 가깝기 때문이다.
싱글 2 리뷰를 하고 나서 내 심경에도 변화가 왔다. 음악적으로 분석하고 파고드는 리뷰를 쓸 수도 있겠지만 그런게 과연 음악을 듣는데
도움이 되는지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서태지 8집도 그런 경우일까. 그냥 즐기면 되는 음악인데
괜히 분석하는 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서태지 음악은 언이지메이킹하지만 동시에 이지리스닝하다. 어쩌면 서태지 음악
에 어울리는 리뷰는 작품 분석(리얼)보다는 청자의 경험에 대한 묘사(리얼리티)일지도 모르겠다. 작품을 더 좋게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나는 평론에서는 형식 미학을 선택하는 편이다. 내용은 별로 신경 안쓴다. 형식보다는 내용 쪽을 신경쓰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에 굳이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기도 하고. 미스테리나 컨스피러시 이런 것에 당장은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다. 내가 관심있는 건 연애다.
그래서 난 요즘 가요들을 좋아한다. 내용적으로 말이다. 장르적인 면에서도 나는 에스에프보다는 추리 소설을 더 즐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 미스테리보다는 미스테리 추리였으면 더 좋아했을 것 같다. 물론 지금 서태지 8집도 추리가 등장하는 부분들도 있긴 하지
만 (원래 미스테리가 있으면 추리도 따라오게 되는 법이다.) 어쨌든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할까. 뭐 그렇다.
서태지 음악은 내가 평론하기 좋아하는 타입의 음악이다. 왜냐하면 개념화하기 쉽기 때문이다. 어떤 스타일과 어떤 장르와 어떤 소스와
어떤 요소들을 썼는지 다 보이기 때문이다. 즉 이미 개념화되어 있는 요소들을 조합하는 음악인 것이다. 마치 레고 블록처럼. 서태지는
장난감을 조립하는 것처럼 음악을 만든다고 한 적이 있다. 거기서 조립할 블록은 이미 존재하는, 개념화되어 있는 음악적 스타일, 요소들,
뭐 그런 것들이다. 그래서 평론하기도 편한 것이다. 이미 개념화 된 것을 어떤 조합으로 조립했는지만 밝히면 되는 거니까. 싱글 1은 그런
조합들의 차이를 밝히는 것을 주로 목표로 했었고 싱글 2는 이미 밝혀진 조합이라는 특징보다는 구성에 더 신경을 썼었다. 서태지도 그랬
고 나도 그랬다. 그리고 세번째에 해당하는 정규 8집에서는 이미 한번씩 썰을 풀은 조합과 구성 둘 모두는 다 써먹었기 때문에 새로운 썰
을 풀만한 뭔가가 있었어야 했는데 그게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뭔가 썰을 풀만한 주제
가 필요한데 그게 아직 나에겐 발견(발명)되지 않았다.
레플리카는 틱탁의 조합과 동일한 조합에서 퀄리티를 좀 더 업그레이드시킨 곡이다. 멜로디도 틱탁보다 좀 더 대중적이 되었다. 아침의 눈
은 구성이 싱글 2와 마찬가지로 좀 독특하다. 하지만 이 부분도 싱글 2에서 이미 많이 언급했기 때문에 지금 다시 지적하는 건 새삼스럽다.
그렇다면 뭔가, 즉 조합이나 구성과는 다른 뭔가가 있어야 한다. 근데 그게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리뷰를 쓸 뭔가
즉 쓸 꺼리라든가 주제라든가 소재, 한마디로 글을 쓸만한 영감, 내용 그런 것이 생각나지 않는다.
새로운 조합. 이런건 없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새로운 구성. 이건 이미 싱글 2에서 많이 나왔다. 새로운 개념화가 필요하다. 그것도
신곡 두곡만이 아니라 정규 8집 전체를 아우를 새로운 관점이. 나는 내용을 분석하기엔 그런 쪽으로는 재능도 없고 관심도 없다.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나는 형식 미학적으로 서태지 정규 8집 전체를 아우를 새로운 관점을, 새로운 개념화를 만드는 데 주력하고 싶다.
만약 그런 새로운 개념화, 새로운 관점을 발명할 수 있다면 리뷰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리뷰는 안쓰고 그냥 넘어갈
가능성도 많다. 쓸 내용이 있어야 쓴다는 것은 중요하다. 리뷰에서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창조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금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고 싶다는 그런 마음도 있다. 앨범이 나오자마자 이렇다 저렇다 하고 나서 그게 맞는지
아닌지를 생각하며 음악을 듣는 건 음악감상에도 별로 좋지 않게 작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리뷰를 쓴다는 건 그래서 장단점이 있다. 장점
은 정보를 수집하고 좀 더 깊이 있게 듣게 된다는 것이고 단점은 앞서 말한대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굳이 새로운 관점이나 새로운 개념
화를 만들어내지 못할 바엔 (그게 형식이든 내용이든 간에) 리뷰를 안쓰는게 나자신에게 더 좋은 거라는 얘기다. 음악을 듣는데 더 좋다는
것이다.
예전에 했던 말이지만 서태지의 창조성, 새로움은 요소들의 창조에 있는게 아니라 요소들의 조합에 있다. 그 조합의 새로움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예술가를 조합형 예술가라고 부른다. 요소들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도 있지만 조합형 예술가도 있다. 평가는 전자가 일반적
으로 높게 받지만 후자도 결코 폄하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전자가 씨앗이라면 후자는 열매라고 할까. 새로움의 층위가 다른 것이다.
비유하자면 전자가 원액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후자는 칵테일의 새로운 조합을 만드는 사람이다. 둘다 창조이고 새로움인건 마찬가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원액의 창조와 조합의 창조는 다른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합의 창조를 원액을 창조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거나 원액의 창조를 조합을 창조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건 핀트를 잘못 맞춘거라는 얘기다. 글리치 idm, 토이트로닉, 드릴 앤 베이스, 이런 모든 요소들, 원액들은 이미 서구 음악 역사에서 다 나온 것이다. 하지만 서태지 8집의 조합은 서태지의 오리지널이다. 그 점이
8집과 그 이전 서태지의 작업들의 차이다. 전에는 조합도 같이 가져왔다면 이번엔 자기만의 독자적인 오리지널 칵테일을 만들어온 것이다.
록+드릴 앤 베이스 = 라이브와이어
록+글리치 idm = 틱탁, 레플리카
록+토이트로닉 = 버뮤다, 줄리엣
일렉트로닉+드릴 앤 베이스 = 모아이
일렉트로닉+글리치 idm = 8집 티져
일렉트로닉+토이트로닉 = 휴먼드림
앞에는 장르 혹은 기반이고 뒤는 요소 혹은 원액이다. 물론 후자도 장르이긴 하지만 서태지 신보에선 장르가 아니라 요소로 쓰였다.
그리고 드릴 앤 베이스나 글리치 dim, 토이트로닉을 요소로 다른 장르에서 차용하는 경우는 과거에도 많았다. 서태지의 새로움은 차용
자체에 있는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조합의 새로움에 있다. 비슷한 조합형 뮤지션인 라디오헤드의 경우와 비교해봐도 서태지의 새로움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코마와 아침의 눈은 비교적 기존의 스타일을 그대로 가져온 곡들이다. 8집에선 좀 예외적인 곡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비트가 쪼개지는 차원이 좀 더 관습적이다. 근데 이런 말은 싱글 1이 나올 때부터 이미 다 했던 말들이다. 그때 이미 분석을 끝마쳤던
것이다. 만약 여기에 덧붙일 말이 없다면 싱글 1의 조합 분석과 싱글 2의 구성 분석으로 서태지 8집 전체를 아우를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어쩌면 새로운 관점이나 새로운 개념화를 발견(발명)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으로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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