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스포츠 토론방에 올라온 글이라는데, 이번 연아 프로그램에서 느낀 걸 잘 설명한 것 같아 퍼왔어.
연아같은 애가 피겨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나오다니...ㅠㅠ 느무 자랑스럽고나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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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사이공>과 <세헤라자데>도 그렇고, <종달새의 비상>의 몇몇 움츠러드는 안무 등은 소녀스러우면서도 동양적 매력을 은근히 풍기는 신비로운 분위기였는데요. 이번 프리는 올림픽 위너가 갖춰야 될 기품있는 모습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아주 귀족적이네요. 아! 어떻게 설명을 드려야 와닿으실지 글을 쓰면서도 손이 떨려요.
플라톤 철학에서부터 시작된 서양의 '귀족철학'
우선 서양 철학의 기본 골자가 되는 플라톤의 그리스 철학 이야기를 조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플라톤의 남다른 도덕철학은 '인의예지'를 강조하는 중국의 유교 사상과도 아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깊이 사랑했던 스승 소크라테스가 목숨을 잃는 광경을 지켜보며 그는 도덕성을 탐구하고 정치철학적 사유를 하게 돼요.
본래 플라톤은 귀족 가문의 출신이었기 때문에 교육수준이 아주 높았습니다. 서양 최초의 저술 철학자가 바로 플라톤이죠. 그의 저서는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으며, 덕분에 우리는 플라톤의 글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철학까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귀족의 도덕적 책무를 아주 엄격하게 정의합니다. 말과 행동은 일치해야 한다며 실천성을 거듭 강조했고, 정치인들은 사유재산을 버리고 개인적 이기심을 벗어나 국가의 진정한 리더, 도덕적이고 모범적인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고 외치죠.
그의 사상들은 현대의 일반 대중들 머리 속에서도 관념의 또아리를 틀고 있어요. 정치를 하는 사람, 돈이 많은 사람, 재능이 뛰어난 사람, 뭔가 일반인들보다 특출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남다른 도덕심과 실천의지, 그리고 선한 동기를 가져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을 우리는 늘 가지고 있습니다. 가진 만큼 모범을 보여야 하고, 실력이 있는 만큼 베풀줄 알아야 한다. 경거망동 해서는 안된다. 공인들은 특히 더 그래야 한다는 편견의 역사는 아주 오래전에 시작된 거에요.
상처 받은 귀족주의
귀족은 교육받은 존재로서 글을 쓰고 읽을 줄 알며, 남다른 지혜로 깊이 있는 혜안을 발휘하고, 국가적 위기 앞에서 명예와 품위를 잃지 않아야 하는 존재. 예술을 감상하는 안목이 뛰어나고 작품을 사랑할 줄 아는 문화 생활의 수혜자들. 이러한 귀족의 멋스러움이 왜곡되거나 철저히 외면받는 시기가 찾아옵니다. 인간을 옥죄고 단죄하려 드는 모든 규범과 양식을 거부하는 운동이 일고, 예술적으로 무차별적인 해체와 붕괴의 시기가 이어지면서, 모든 것이 평등하다, 아무것도 차이가 없다, 기품/품격/품위는 모두 가식이다, 이런 사상들이 세상을 뒤흔들죠.
귀족주의에 대한 향수
인류는 금세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 휩쓸렸고, 무엇이 아름다움이고 무엇이 진짜 가치인지를 상실한 채, 저마다 떠들어대기 바쁜 무한 발언권의 시대로 돌입합니다. 소위 '개나 소나 떠들어대는' 혼란기가 온거죠. 형식미에 사로잡힌 보수적인 예술에 반하여 자유로운 표현양식이 발달하기 시작했지만, 그 부작용으로 생뚱맞고 무가치해보이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 예술들'까지 나타납니다.
정보가 공해가 되는 시점에 이르면 인간은 '쾌적한 시절'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돼요. 머리로는 누구나 똑같고 평등하다는 것을 알지만, 생존 본능은 이제 그게 싫어지는거죠. 세상이 너무 시끄럽고,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차고, 아무리봐도 아름답지 않은데 아름답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생겨나면, 삶이 피곤하고 지치니까요.
몰라보게 기품이 생긴 김연아
평소 김연아 선수를 일컬어 우아한 선수라는 말을 자주했었는데요. 오늘은 그냥 우아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되는 무언가가 있더군요. 다른 선수들과 차원이 달라 보였고, 비교하는 것조차 불쾌한 일이 될 만큼 '격'이 달랐습니다. 위압적이진 않았지만, 아무도 토를 달 수 없을 만큼 홀로 빛나고 홀로 완전해 보였어요. 목청 높여 질타하는 이가 없음에도, 수준 낮은 초라한 피겨 연기가 얼마나 볼품 없는 것인지 귀로 들리는 것 같았어요. 막눈을 감싸고 있던 축축한 점막이 한꺼풀 벗겨져 나간 느낌. 드디어 '진짜'를 보게 되는 경험. 그런 것이었습니다.
아!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다'는 말이 이걸 뜻하는거였구나. 조지 거쉬인 피아노 협주곡 바장조에 대한 감상을 '깔끔해서 좋았다'고, 머뭇거리고,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고, 다시 입을 열어도 '깔끔했어요'라는 말만 했던 연아의 인터뷰. 깔끔하게 들렸어요. 깔끔한 것을 배웠어요. 진짜가 뭔지 보여줄게요. 그런 메세지였구나. 전율이 오더군요.
<거쉬인 피협>의 예술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낸 연아는 그 성장과정을 <거쉬인 피협>으로 재현합니다. 그 일련의 과정이 서양의 철학과 예술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세헤라자데 - 신화와 설화>, <종달새의 비상 - 동화>, <록산느의 탱고 - 열정과 욕망, 그리고 방황>, <박쥐 서곡 - 명랑한 사교춤, 아름다운 형식성>, <죽음의 무도 - 창조적 파괴>, <007 본드걸 - 영화, 권력, 물질, 대중 문화>, 그리고 <거쉬인 피협 - 정제된 아름다움, 기품 있는 귀족적 자태>.
정점을 찍는 거쉬인 피협은 예술을 음미하는 안목이 대중보다 좀더 까다로운 심판진을 공략하기 아주 좋은 프로그램인 것 같아요. <죽음의 무도>는 구성이 꽉 차 있고, 그 파괴적이고 뒤틀린 춤사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는 이를 압도하는, 마력과도 같은 주술적 힘을 가지고 있죠. <거쉬인 피협>은 다분히 서구적인 양식으로 실용적이고 경험적이며 신세계를 탐험하는데 두려움이 없었던, 북미의 '마지막 귀족들'을 연상시킵니다. 사업을 일으켜 돈 벌기 바쁜 부르주아 계급들 틈속에서 마지막까지 귀족적 가치를 빛낸 그들의 순수하게 우월한 이미지가, 다른 선수들과 비교를 불허하는 경지로 홀로 승천(?)해버린 연아의 독보적인 이미지와 오버랩되고 있어요.
겉치레와 군더더기, 그리고 허황된 관념주의를 내던진, 유럽의 귀족들보다는 훨씬 더 실용적이고 실리적인 것을 추구했던 북미의 마지막 귀족들. 그 순수하고 정제된 기품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쇼트 프로그램이 대중 문화의 상징인 <007 본드걸> 연기라는 점에서 그 '대조적인 양상'이 주는 아름다움이 더욱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죠.
쇼트 프로그램 이탈리아 자막 버전 보셨는지요. '북미의 피겨 훈련내용이 훌륭한 것 같다. 부럽다'라는 언급이 있었죠? 김연아 선수의 한층 더 향상된 기량을 보고 있노라니 코치진의 노고를 치하하지 않고는 못베겼을거에요. 김연아라는 걸출한 스타가 캐나다에서 훈련을 받으며 무섭게 성장했고, 동계 올림픽까지 캐나다에서 열리니, 단순한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했겠죠. 연아 선수 역시 이것까지 감안해서 오서 코치를 원했던 건지도 모르고요.
경기 우승을 위해 조건을 만들고 전략적 승부를 거는 것은 순수예술과는 거리가 멀지만, 피겨는 어디까지나 스포츠 경기이기 때문에 이런 전술적인 프로그램 구성은 필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녀는 어떤 연기도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습니다. 이번엔 귀족이 되는 거에요. 우리는 그녀의 손끝 발끝 속눈썹 끝을 따라 서양 세계의 향연을, 그들이 선사하는 축제를 즐기면 돼요. 기품있게 턱을 치켜들고 있는 연아처럼, 우리도 어깨 힘주고 도도하게 감상할 수 있으니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전설적인 인물이 이 땅에서 태어난 덕분에, 이렇게 안목이 높아지고 삶이 행복해지네요. 이 자존감 회복의 경제적 효과는 실로 어마어마하죠. 다음 시즌엔 또 다른 모습으로, 또 다른 세계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줄텐데, 감당이 될까요.
귀족적 Attitude
이틀 전 sbs 다큐에서 캐나다 해설자의 인터뷰를 곁들였던 거 기억하실거에요. 거기서 그 해설자에게 기자가 '김연아 선수에게 조언할 게 있으면 해달라'고 하니까, '제가 연아에게 조언을 하라고요?' 어이 없어 했죠 ㅋ. 그러면서 굳이 연아에게 조언을 하라고 시키니 내가 말을 꺼내긴 합니다만, 이런 뉘앙스로 웃으면서, 연아에게 얼굴을 잘 사용하라는 말을 합니다. 얼굴로 심판에게 무언가를 전달해야 더 완벽해질 수 있다는 말을 하죠.
서양 사람들에게는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고, 굽신거리는 행동 등은 부끄럽고, 자신없고, 신분이 낮아 보이는 모습으로 인식됩니다. 얼굴로 자신감과 명예로움을 드러내는 건 서구사회에서는 당연한 거에요. 서양에도 '목례'가 있지만, 동양처럼 바짝 엎드리기 보다는 까닥- 하는 수준으로 가볍게 목을 숙인다거나, 한쪽 무릎 혹은 양쪽 무릎을 살짝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가, 바로 들어요.
서양은 귀족적인 attitude에 대한 환상이 아직도 있습니다. 이런 이미지를 분명히 연아에게 가르쳤을 겁니다. 기품있게 행동하는 모습이 오늘 새롭게 엿보였거든요. 얼굴을 도도하게 들고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보여라, 어깨를 펴고 나긋한 시선을 보내라, 편안하고 온화한 심리 상태를 유지해라, 마치 잘 가르쳐 놓은 것처럼 보여요. 이러한 attitude는 챔피언에게, 위너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 문화가 익숙한 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릴 것이며, 연아는 영원히 여왕으로 군림하겠죠.
점프 안 한거 정빙 상태가 좋지 않아서였다던데, 그런 태도까지 마음에 드네요. 까탈은 아무나 부리는게 아니죠. 부상 방지를 위해서도 현명한 판단이었다 생각됩니다. 선택적으로 점프를 회피해서 그런지 그 후 프로그램을 마칠 때까지 정말 차분하게 아무 문제 없다는 듯이 연기하더군요. 그게 엄청 대단해 보였어요.
마치며...
점프 하나를 통채로 날리고도 133.95점이 나왔습니다. 예술사와 철학사를 넘나드는 풍부한 인문학적 배경 위에서 연아 하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유니크한 작품들. 그렇게 작품 하나를 탄생시키는데 온 힘을 다 쏟아 넣고서도, 연아의 천재성과 성실한 훈련 태도만 칭찬하기 바쁜 코치진들에게, 오늘 아주 아주 큰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눈을 감고도 세상을 꿰뚫어 보는, 하지만 그 시선이 차갑거나 무섭거나 건방지지 않고, 여유 있고 배려 넘치고 품위있는, 그런게 서양인들의 '권위'에 제대로 먹히죠. 쇼트와 프리 구성 정말 빈틈이 없네요. 연아의 '깔끔했다'는 말과 오서 감독의 '준비 많이 했다'는 말이 머리 속에서 계속 맴돌아요.
해외 비평가들이 찬사를 별빛처럼 쏟아낼거에요. 물 만난 고기마냥 어떤 글을 쓸까, 어떻게 표현할까 안달이 났을 겁니다. 묘사력 딸려서 언어혁명 일어날까 걱정됩니다. 프리 경기 보고 밤잠 설치신 분들의 마음 속에, 편안하고 행복한 기쁨이 꿈결처럼 스며들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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